安義(안의) 사람 사는 이야기

 

제목 : 2012 동인문학상] "내 문학은 허깨비다"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2-10-06 조회수 : 517

 

        어수웅 기자

 

 

입력 : 2012.09.27 23:49

[2012 동인문학상 최종 후보 5명 연쇄 인터뷰] [5] '어떤 작위의 세계' 정영문
'생각'이란 단어 1000번 넘게 등장… 상념이 표류하는 샌프란시스코 체류기
"내 글쓰기는 無用하며 허황된 고찰"

 

수상작을 선정한 뒤 책으로 펴내는 대부분의 문학상과 달리, 동인문학상은 이미 출간된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다. 상업성을 탈피한 순수함만으로도 최고의 문학적 권위를 인정받는 이유다. 가을은 동인문학상의 계절. '2012 동인문학상' 후보가 김중혁·김애란·박형서·정영문·한강으로 압축됐다. 10월 초 수상작 발표를 앞두고 최종심에 진출한 5명의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정영문의 차례다. 2012년 최고의 성취를 거둔 문학 작품을 함께 읽으며, 독자 스스로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의 한 명으로 참여해 보시기를.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정영문(47)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이다. 정영문 스스로도 다른 작가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걷고 있고, 대부분의 소설 독자도 '정영문 월드'를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을 것이다.

많은 진지한 작가가 세계의 원리를 탐구하고, 삶의 문제에 대한 답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할 때, 이 허깨비같은 작가는 "웬 부질없는 노력"이냐며 침대에 벌렁 누워버린다. 세계는 원래 무의미하고 나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데 뭐하러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고. 그러고는 밤새 뒤척이며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주절거린다. 그런데 그 중얼거림과 주절거림이 치밀하고 정교하다. 작가의 다섯 번째 장편 '어떤 작위의 세계'(문학과지성사)는 바로 그 집대성.

 
문장을 쓸 때, 섬광처럼 이는 희열. 정영문이 문학하는 이유다. 물론 이내 말끔히 사라져버리는 순간이지만. /사진 김병관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이라고 학대했다. 그런데 이 무용하고 허황된 고찰을 따라 읽다 보면, 피식 피식 웃음이 터지고, 어느 순간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배를 그러안고 뒤집어지는 경험을 한 번은 꼭 하게 된다. 그러니 전제가 있다. 좌정하고 밑줄 치며 읽을 게 아니라, 반드시 당신도 침대에 누워 이 책을 집어 들 것.

'어떤 작위…'는 표면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체류기 아니,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표류기. 2010년 봄에서 여름까지 이 도시에 거주했던 작가가 주인공인 '나'를 내세워 생각과 상념을 제멋대로 풀어나간다. 어떤 계통과 맥락도 없다. 말 그대로 자유분방.

"전날 저녁에는 옥수수 2개를 삶아 그중 하나의 알갱이들을 일일이 하나씩 떼어먹으며 꽤 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옥수수를 먹으며 다른 옥수수를 검사하듯 자세히 보았는데, 세로로 줄이 18개였고, 한 줄에 알갱이가 40개 정도로, 옥수수 하나의 알갱이는 모두 720개쯤 되었다. 삶지 않은 옥수수 4개도 살펴보았는데, 줄이 15개에서 18개 사이였고, 한 줄에 있는 알갱이는 35개에서 42개 사이였다. 다른 옥수수 하나의 알갱이도 일일이 떼어먹었고, 반쯤 먹었을 때 이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고, 먹기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옥수수 알갱이를 세는 것은 시간을 가게 하는 좋은 방법 같지 않았고, 그렇게 해서는 시간이 더 안 가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라곤 안 갈 때는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217~218쪽)

어쩌면 세상의 무의미에 대해 문학의 무의미로 맞서는, 정영문식 복수일 것이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궁상과 청상의 차이를 비교하고, 샌프란시스코 게이와 레즈비언의 풍속과 생태를 고찰하며, 하와이 오하우섬을 투덜거리며 돌아다닌다.

이 소설에는 '생각'이라는 단어가 1000번도 넘게 등장한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의미와 의미의 경계는 줄줄 흘러내린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는 "심리적·내면적 서술의 차원에서도 한국 문학의 진화를 보여주는 작품이지만, 계속 독서를 하며 함께 진화해온 문학 독자들 입장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고급하고 유쾌한 텍스트"라고 호의적 지지를 보냈다.

작가는 "애초 샌프란시스코에서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었는데 일이 단단하게 잘못되어 어쩌다가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면서 "하루하루를 노도 없는 조각배에 실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기분으로 지내며 썼고, 그래서 더 표류기에 가깝게 여겨질 것"이라고 했다. 이전에 붙어있던 '난해소설' '실험작가'라는 꼬리표도 이 작품으로 뗄 수 있으리라. '정영문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정영문은…

만성 어지럼증과 불면증이 있다. 넋을 잃고 있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미친 듯이 달려들어 쓴다. 1996년 장편 '겨우 존재하는 인간'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장편 '달에 홀린 광대' '바셀린 붓다', 소설집 '검은 이야기 사슬' '목신의 어떤 오후' 등을 썼다. 존 파울즈의 '에보니 타워'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등 번역가로도 신뢰받는 이름이다. 1965년 경남 함양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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