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국경분쟁

 

제목 : 일제 강점기 백두산 등반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2-07-20 조회수 : 1076


일제강점기 등반이 대부분, 98~08년 이후 없어

북녘의 산들은 ‘조국의 자존심’이었다



글 곽정혜 기자



조선의 최고봉이자 민족의 자존심, 백두산

조선인과 중국인 외에 백두산을 처음으로 오른 외국인은 영국 출신의 영 허즈밴드(Young Husband)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86년에 식물학자 제임스(H. E. M. James) 등과 함께 백두산에 오른 후 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후 1891년에 굴드 아담스와 카벤디쉬가 백두산 정상에 올라 높이를 측량했으며, 1985년, 1898년, 1902년에 각각 러시아팀이 백두산을 등정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7월, 일본인 최초로 이마가와 유이치가 학술조사단을 이끌고 백두산을 오른 후 등행 보고서 일부를 <일본산악회연보>에 발표했다. 이후 1907년까지 측량 등의 군사목적을 가진 3개 팀이 백두산에 올랐다. 1909년에는 당시 경성법원장이던 조 가즈마(일본산악회 창립멤버) 일행이 등반에 나섰는데, 이는 조선과 중국의 국경문제를 해결하고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한 답사였다. 일본은 1920년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대륙침략의 야욕을 드러냈고, 조선의 독립투사들은 백두산을 기점으로 격렬한 항일독립투쟁을 함으로써 백두산은 곧 ‘혁명의 성산’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1921년 동아일보 민태원 기자는 함경도가 주최하는 집단등행회에 참가해 백두산을 오른 후, 그 기행문인 <백두산행>을 동아일보에 17회에 걸쳐 연재했다. 육당 최남선 또한 1926년 조선교육회가 주최한 박물탐사단에 참가해 백두산을 등반하고 동아일보에 <백두산근참기>를 연재했다. 1931년에는 당시 조선일보 부사장이었던 민세 안재홍과 그 일행이 무산군이 주최한 백두산탐사대에 참가했으며, 민세 역시 조선일보에 <백두산등척기>를 34회에 걸쳐 연재했다. 1935년 중앙일보 주필 이관구는 비행기를 이용해 백두산 정상과 천지를 항공탐사하고 그 기록을 중앙일보에 16회에 걸쳐 연재했다. 1936년에는 조선일보가 순수 조선인들로만 백두산탐험대를 편성해 백두산 등반에 나섰는데, 이때 참가한 33인의 등반기와 각 전공분야의 글들이 당시 조선일보와 각종 월간지에 발표됐다. 1992년에 수문출판사가 그 글들을 모아 <아아! 천지다>를 발간하기도 했다.

순수 등반을 목적으로 백두산을 찾은 최초의 일본인은 조선총독부 철도국 직원이던 이이야마 다쓰오로, 그는 1929년 7월에 조·일 혼혈인 임무와 함께 등반했다. 이이야마는 1931년에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들과 함께 조선산악회를 설립하고 백두산과 금강산 등지에서 활발한 산악활동을 이어갔다. 1934년 12월에는 일본 교토제대산악부가 동계 백두산 등반을 하기 위해 경성에 왔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낭가파르바트와 캉첸중가를 시등하고, 영국에서는 에베레스트를 공격하는 등 서구열강들이 앞 다투어 히말라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일본 또한 그 기류에 편승해 히말라야 원정을 준비했고, 그를 위한 포석으로 기상조건이 나쁘고 어프로치가 힘든 동계 백두산을 택한 것이었다. 그해 9월에 이미 정찰등반을 했던 교토제대산악부는 조선총독부와 군사령부, 함경도 주둔 일본군 19사단의 후원을 받아 동계 백두산 등정에 성공했다.

교토제대산악부의 동계 백두산 등반은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과 조선인 산악인들은 물론, 일본 본토의 여타 대학산악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1936년 6월 조선산악회 소속 일본인들은 백두산 동-서 횡단등반에 나서, 무산에서부터 출발해 정상을 거쳐 대연지봉과 무두봉을 차례로 종주했다. 그해 겨울에는 경성제대산악부가 동계 관모봉을 등반하고, 1940년 3월에는 오사카상대산악부가 적설기 백두산을 스키로 등정하며 교토제대산악부에 한풀이를 했다.

조선인들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조선산악회 창립에 자극받은 조선인들은 엄흥섭을 리더로 금요일마다 집회를 여는 순수 산악단체인 금요회(1938년에 백령회로 개명)를 결성했다. 1941년 12월, 백령회의 김정태는 교토제대산악부보다 더 어려운 동계 백두산 등반을 기획했다. 즉, 백두산의 주릉인 마천령산맥의 모든 산을 종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지에 주둔하는 일본군이 허가를 내주지 않아 결국 조선산악회와 공동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시이 요시오가 대장을 맡았으며, 조선인으로 김정태, 주형렬, 양두철, 방현, 류재선이, 일본인은 이이야마 외 4명이 참가했다. 이때의 등반기는 김정태의 <등산 50년>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1942년 7월에는 보성전문산악부 9명이 백두산을 올랐고, 이듬해에는 양정중학교 고희성 대장 외 14명이 백두산을 등정하기도 했다.







1943년 백두산 천지에 올라 만세를 부르는 양정고보 산악반 회원들



1942년 여름부터 일본의 패전기미가 엿보이더니, 12월에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조선어망주식회사를 경영하던 시로야마 세이소는 1942년과 43년에 백두산에 올라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행사를 기획했는데, 조선총독부는 이를 승낙하고 자금까지 지원했다. 각각 42명과 43명의 일본인과 친일산악인들이 정상에서 승전기원을 했던, 사상 유례가 없는 이 행사의 보고서로 <등행(登行)>이 남아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로 중국이 점차 해금되며 만주지방을 거쳐 중국 쪽으로 백두산을 오를 수 있게 되었다. 1990년 한국산서회의 이병태 등 치과의사답사대가 해방 후 처음으로 백두산에 올랐다. 1992년에는 월간<산> 후원으로 이용대, 유학재, <산> 안중국 기자 등 8명이 연변에서 백두산 천지를 밟은 후, 장백폭포와 무명폭 빙벽을 등반했다. 이후 지금까지 많은 한국인들이 답사와 등산, 관광 등을 목적으로 백두산을 찾았지만, 중국을 통한 반쪽짜리 등행만이 허락될 뿐이다.



‘한국 알프스’ 개마고원에 위치한 2위봉, 관모산

개마고원 내에 자리 잡은 관모산은 해발 2,541m로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높지만, 백두산 장군봉의 아성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등산이나 답사를 목적으로 관모산에 오른 사람은 고산자 김정호일 것으로 막연히 추정된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1918년 일본 동경제대 식물학 교수인 나가이 모노스케의 답사가 처음이다. 그는 이때의 등반기와 식물분포조사기를 이듬해 <일본산악회지>에 연재했다. 같은 시기 조 가즈마 일행이 관모봉과 함께 설령을 등반한 후 같은 곳에 등산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함북 나남에 거주하는 사이토와 그 일행이 궤상봉과 관모봉을 오르고 도봉(2235m)을 초등했다. 1930년 이이야마 일행 3명은 관모봉의 모든 연봉을 답사한 후, 이듬해 8월에 완전 종주를 해냈다. 1932년 7월에는 10개가 넘는 팀이 개마고원으로 몰리며 ‘조선 알프스 전성시대’를 열었다.

1931년 3월에 일본인 가모가 단독으로 동계 등반을 시도했으나 등정에는 실패했다. 1933년 12월 구로다 부부 또한 관모산에 도전했으나 궤산봉을 초등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관모봉의 겨울 초등반은 이듬해 3월 경성제대산악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이후 1935년 12월과 1942년 12월에 2차와 3차 동계 등반을 성공해냈다. 또 이에 질세라 조선산악회와 와세다대학산악부도 차례로 동계 관모산에 올랐다. 조선인으로 관모봉을 처음 오른 이는 김정태로, 그는 1939년 3월에 단독으로 관모산과 북설령을 함께 등정했다. 이후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색이 짙어지며, 김정태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관모연산의 겨울등반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1~42년 겨울 마천령산맥을 종주하고 있는 김정태(선두)와 대원. 당시 현지에 주둔하는 일본군이 등반허가를 내주지 않아 조선산악회와 공동으로 추진해야 했다.



부전고원에 솟은 3위봉 북수백산과 4위봉 차일봉

부전고원은 개마고원 서쪽 삼수(三水)·갑산(甲山)의 일부 지역에 위치한 해발고도 1,200m의 고원으로, ‘한국 8승’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부전고원 일대에는 대암산(2205m)을 비롯해 피라미드형의 차일봉(2506m)과 북수백산(2522m), 목련산(2164m) 등의 고봉이 솟아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들의 중심에는 부전호가 있는데, 이 인공호수는 1931년 6월, 일본이 흥남질소비료회사를 위해 부전강을 막아 만든 것이다. 이 부전호 방죽이 완공된 이후, 일본과 조선의 산악인들과 과학자들이 부전고원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조선 3위봉인 북수백산을 초등한 사람은 이이야마와 이이누마로, 그들은 방죽 완공 직후에 이곳을 올랐다. 두 달 후에는 기시나미 요시히고가 북수백산과 차일봉, 운수백산(2476m) 등지에서 고산식물을 채집했는데, 그는 1935년에 <부전고원>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1935년 8월에는 조선총독부 임험시험장에서 일하던 정태현과 경성대 재학생 조복성 등이 식물조사를 위해 부전고원 일대를 답사하고 차일봉에 올랐는데, 이는 조선인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학회에 <부전고원 약용식물 생태와 분포>를 발표했는데, 이 일은 많은 일본인들이 부전고원을 찾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차일봉 동계초등은 1935년 경성제대산악부의 이즈미 일행이 이뤄냈다. 이들은 1937년에 30여명의 대원을 이끌고 와 부전고원 일대를 9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보름간 등반했다. 조선에서는 1940년 1월 백령회의 엄흥섭과 김정태, 방현 등이 북수백산과 차일봉, 연화봉을 연이어 등정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들은 이듬해 1월에도 동계 연화봉을 등정했다. 1942년 여름 류재선, 이억윤, 정규홍, 엄익환 등도 북수백산과 차일봉을 등정했고, 같은 날 양정중학생 고희성 외 6명도 북수백산, 차일봉, 운수백산을 등정했다. 이밖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많은 등반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근대 암벽등반의 메카, 금강산

유사 이래로 조선의 문장가와 유람객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던 곳이 금강산일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금강산 답사의 기록들과 남아있는 기행문집이 셀 수도 없이 많은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주로 유람이나 기행의 대상이었던 금강산을 산악 행위인 등반으로 처음 오른 이는 신정왕후(헌종의 친모)의 조카이자 도승지를 지낸 조성하라는 인물로, 1865년의 일이다. 일본인으로 금강산을 처음 찾은 이는 하시모토와 그 일행이며, 이들은 1912년 12월과 이듬해 1월에 걸쳐 금강산을 답사했다.





1989년 금강산 집선봉을 등반하고 있는 선우중옥씨



1920년 전후로 서울 근교의 암벽에서 근대등반이 태동하기 시작하며 그 대상지가 북한산에서 금강산으로 옮겨갔다. 일본인들은 조선산악회를 설립하기 1년 전인 1930년 5월에 ‘금강산협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금강산 등반에 나섰다. 그해 겨울 이이야마와 임무가 스키를 이용해 비로봉을 등정했는데, 이는 금강산에서의 첫 동계 등정으로 기록된다. 1931년 9월 조선철도협회가 그 전해부터 경성일보에 연재된 금강산의 기록을 모아 책으로 출간하면서, 금강산이 일본인들에게 인기를 큰 끌게 된다. 또 그 이듬해에 경성제대산악부 이즈미 일행이 채하봉과 육선봉의 암벽등반 성공하고, 동경제대 오가와 일행이 집선봉, 동북릉 등정과 함께 세존봉 암벽등반을 성공한 후 <동경제대산악회보>에 보고문 발표함으로써, 금강산의 암벽이 일본산악인들에게 각광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1933년부터 금강산은 조선산악회와 경성제대산악부의 치열한 초등 경쟁 무대가 되었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조선 출신 산악인들의 등반활동도 활발히 이어졌다. 1937년 7월 김정태, 엄흥섭, 이재수 외 4명이 집선봉과 동북릉 2봉을 초등했는데, 이는 금강산에서 이뤄진 한국인 최초의 암벽 등반이었다. 김정태 일행은 이듬해에 집선봉의 동북릉 1봉에서 7봉까지 초등해내기도 했다. 일련의 등반에 탄력을 받은 그는 1939년과 1940년에 집선봉 동북릉 2봉 중앙벽을 시도했으나, 연거푸 실패하고 말았다. 김정태는 1940년 10월에 주형렬, 양두철과 함께 다시 도전해 12시간 만에 벽을 넘어서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저서 <등산 50년>에 “인수봉 정면벽의 3배가 넘는 이 벽은 금강산 일대에서 최고의 수직벽이자 한반도 전체에서 최대 최난의 벼랑’이라고 남겼다. 한편, 그는 1942년에 4년 전 자신이 초등한 집선봉 동북릉 코스를 7봉부터 1봉까지 역주행하는 데 성공해내기도 했다.

조선인들의 동계 등반은 1935년 2월 김정태와 엄흥섭이 스키를 이용해 금강산 비로봉을 등정한 것이 처음이다. 그들은 비로봉 등정 후 옥류동 계곡에서 빙폭을 등반하기도 했다. 이 등반콤비는 1937년에는 일본인 이시이 요시오와 함께 집선봉 동북릉 1봉에서 동계등반을 했고, 1938년에는 동계 서북릉을 종주했는데, 이때 3개의 빙폭을 넘어 1440봉과 1482봉을 초등했다. 1939년에는 방현과 함께 동북릉 설계와 북벽을 초등했다. 하지만 급박한 국제정세와 일본의 패망으로 금강산에서의 공식적인 등반기록은 적설기 등반은 1939년에, 암벽등반은 1942년에 끝을 맺었다.

탈냉전과 소련의 개혁·개방의 영향인지, 북한은 1984년 체코등반대에게 금강산 등반을 허락했다. 이들은 이 때 비로봉을 등반하고, 이듬해 파견된 2차원정대는 바리봉과 수정봉을 오르고 온정리 부근의 암벽을 등반했다. 이후 폴란드등반대도 금강산을 등반했다고 하나, 대상지가 어디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987년 2월에는 일본의 다카하시 미치코 외 4명이 동계 집선봉을 등반하기도 했다.

1989년 북한은 해외교포와 외국인에게 금강산을 해금했다. 그해 미국 LA에 거주하던 교포 오종호(서울치대산악부 OB)가 금강산을 답사했으며, 재미산악인 선우중옥, 손성락 등이 집선봉을 등반했다. 선우중옥은 1993년에 주영과 함께 집선봉을 다시 등반하기도 했다. 1995년 4월에는 미주 한인산악회원 13명이 내·외금강을 등산하고, 구룡폭 옆 상팔담에서 암벽등반을 했다. 이후 그들은 이 루트를 ‘동서남북길’로 명명했다.

1998년 11월부터 북한당국과 남한의 현대그룹이 협력해 금강산관광을 시작했는데, 이후 2008년까지 10년간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의 수는 약 195만 명에 이른다. 그 사이 행해진 산악활동으로는 2004년 1월 서울산악조난구조대(대장 김남일)가 비봉과 구룡폭포를 등반한 것이 해방 이후의 첫 등반기록이다. 이때 김현중이 구룡폭(80m)을, 이동석이 비봉(100m)을 초등했으며, 홍희영과 변봉희가 각각 구룡폭과 비봉의 여성 초등자로 기록됐다. 서울산악조난 구조대는 2005년부터 이후 3년간 구룡폭 일대에 ‘아산길’ ‘독립문길’ ‘네파길’ 등의 새로운 암벽루트를 개척하고, 2006년에는 금강산 해수욕장에서 북측 금강산 산악구급봉사대와 함께 산악구조법 및 응급처치법 합동연수를 개최했다. 특이한 행사로는 2005년 1월, 한국등산학교가 개교 30주년을 기념해 금강산에서 6박 7일간 동계 등산학교를 개최한 일이 있다. 비봉과 구룡폭 일대에서 진행된 이 교육에서는 55명의 교육생 전원이 구룡폭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20여 년, 남북화해기 10여 년간 반짝했던 북녘의 산들, 그 등반사가 다시 이어질 날을 기다린다. ⓜ





북한에도 등산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서구의 알피니즘과 같이 산 그자체가 목적이 되는 활동으로는 보기 힘들다. 사진에는 ‘항일혁명의 발자국을 따라서’라는 설명이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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