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적 100년 자료실

 

제목 : 독도는 광무 4년 칙령상 우리 땅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4-09-18 조회수 : 757
 

 

독도(獨島)는 광무(光武)4년(1900년) 10월27일 관보에 실린 칙령 제41호 제2조에 근거해 볼때 우리 영토임이 분

명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동국대 임영정(역사교육과)교수는 국립제주박물관이 19세기말 제주의 사정업무를 담당한 '察理使 李奎遠'전 기

념으로 17일 마련한 '이규원 검찰사와 독도의 인지'라는 특별강연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임 교수에 따르면 이 칙령은 일본이 주장하는 명치 38년(1905년) 1월28일 죽도(竹島)의 영토 편입에 관한 각의

(閣議) 결정에 의한 국가로서의 영유 의사보다 5년 앞섰다. 



이 칙령은 '군청(郡廳)의 위치는 대하동(台霞洞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

를 관할할 사(事)'로 표기했고 석도가 독도(獨島)임음 이미 알려진 일이라고 임 교수는 밝혔다. 



임 교수는 석도(石島)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돌섬'이 되는데 당시 울릉도에 많이 거주했던 전남 고흥지방 사람들

의 방언으로 '돌(石)'을 '독'이라고 불러 당연히 석도(石島)가 독도(獨島)라는 주장도 발표됐다고 소개했다. 



또 독도가 울릉군의 부속도서로 편입되는데는 고종 18년(1881년) 울릉도 검찰사로 임명된 이규원이 이듬해 4월

30일부터 5월8일까지 울릉도를 탐사한후 제출한 보고서와 1900년 6월중순 우용정(禹用鼎) 울릉도 시찰위원이 제

출한 청의서(請議書)가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그는 밝혔다. 



이규원은 고종의 명에 따라 울릉도에 상륙, 5월8일까지 섬의 구석구석을 답사했고 섬을 배편으로 일주한데 이어 

성인봉 정상까지 올라 송죽도(松竹島). 송도(松島). 죽도(竹島)를 찾고자 했다고 임 교수는 전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이도 상거불원 풍일청명 칙가 망견'(二島 相距不遠風日淸明 則可 望見 두섬이 멀지않

아 바람 불고 청명한 날 볼 수 있다)'이라고 기록돼 독도가 울릉도에서 볼 수 있는 시기가 대략 11월로 편서풍이 

심하게 불어 해무가 사라진 날 오후에 울릉도의 고지대에서 독도가 아련하게 보인다'는 점과 일치한다고 임 교수

는 강조했다. 



한편 이규원 검찰사는 조선 말기 제주도 찰리사와 군무아무대신도 역임했는데 제주도와 조선의 영토지키기에 노

력했고 독도에 대한 인지의 폭도 넓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





    

 

기사작성 2004.09.17. 18: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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