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적 100년 자료실

 

제목 : 지리지도학자 김정호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4-08-18 조회수 : 1016


*《나는 반드시 정확한 지도를 만들리라.》 



김정호는 그렇게도 소원하던 서울 규장각의 지도를 친구의 도움으로 손에 넣게 되였다. 

그는 먼저 이 지도가 정확한가를 알아 보기 위해 조사해 보았으나 그것은 믿을만한것이 못되였다. 실지와 엄청나

게 틀리였다. 

《지도라는것이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겠는가? 아니다. 나는 반드시 정확한 지도를 만들

리라.》 

김정호는 어린 시절 서당에 다닐 때부터 산과 강의 위치, 시내의 위치를 모래바닥에 그리면서 크거들랑 반드시 

지도를 만들것이라고 속다짐하였다. 

《내 일생을 다 바쳐서라도 한번 해보리라.》 

그는 거듭 마음 다졌다. 

지리지도학자 김정호는 본래 황해도사람으로서 서울 남대문밖 만리재에서 살았다고도 하고 또는 서울 서대문밖 

공덕리에서 살았다고도 한다. 

그의 출생과 생애에 대하여 명확히 알려 진것은 없고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전해 오고 있을뿐이다. 

이런것으로 보아 그의 집안이 당시에 있어서 그리 지체가 높은 가문이 아니였으며 매우 가난한 살림을 이어 가

고 있었다는것을 말하여 준다. 

김정호는 자를 백원 또는 백온이라고 하였고 고산자라고도 불렀다. 

그는 일찌기 실학파의 한 사람이였던 최한기와 친교를 가지였으며 실학자들과 많이 접촉하면서 그들의 《실용지

용》에 공감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근면하였고 학구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의지가 강하여 한번 먹은 마음은 변함이 없

는 성격이였다. 그것은 그가 혼자의 힘으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원래 지도제작이란 일개인이 할 일이 아니라 응당히 국가적인 사업으로 되여야 한다. 

하지만 김정호는 이러한 큰일을 혼자의 힘으로 그것도 가정과 일생을 다 바쳐 해내고야 말았다. 그러니 김정호야

말로 진정한 애국자로 높이 내세워야 할것이다. 

김정호가 활동하던 19세기 후반기는 봉건통치배들의 당파싸움으로 하여 나라형편이 말이 아니였다. 

밖으로는 유미자본주의렬강들이 우리 나라를 먹어 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를 막아 

내자고 하여도 지도는 반드시 필요한것이였다. 

뿐만아니라 상품류통과 사람들의 왕래가 점차 활발해 지는 사정은 지리학적지식과 실용적인 지도가 요구되였

다. 

때문에 김정호는 정부에 정확하고 상세한 지도작성문제를 여러차례 제기하였다. 

일찌기 실학자들과 접촉하면서 김정호는 《보물을 잘 지키는 사람은 그 보물을 똑똑히 알아야 하는것과 마찬가

지로 자기 나라 강토를 잘지키자면 먼저 자기 나라의 산천과거리의 모양이 어떻게 되여 있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한 선배 리익의 말을 항상 명심하고 이 사업을 추진시키려고 한것이였다. 

김정호는 정부에 제기한 건의서에서 나라의 경제, 군사상 모든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서는 정밀한 지도가 있어야 

한다는것을 강조하면서 구체적인 지도작성절차와 방법, 세칙에 이르기까지 밝혔다. 

그리고 지도에는 매개 주, 현들에서 먼저 읍을 쓰고 다음에 읍이 생긴 연혁과 고읍, 방면, 물과산, 성곽, 역과 참, 

선척, 다리, 섬, 언제, 토산물, 무덤과 절간, 정자와 루각, 명승고적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내용을 세밀하게 기록

할데 대하여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의견을 냈다. 

그러나 제놈들의 권세와 물욕에 눈이 어두워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관료배들은 지도제작문제따위는 거들

떠 보지조차 않았고 오히려 국가기밀을 루설한다는 죄를 뒤집어 씌우기까지 하였다. 

자기 힘으로 지도를 기어이 만들어 내리라는 김정호의 결심은 굴함 없었다. 



* 10여년만에 돌아온 집 



그리하여 김정호는 괴나리보짐을 틈에 지고 헌 삿갓을 쓴채 지팽이에 의지하여 전국의 땅을 자신이 직접 조사하

기 위한 길에 올랐다. 

지금처럼 기차나 자동차가 있는것도 아니고 오직 걸어서만이 모든 곳을 돌아야 하는 어려운 환경에서 그의 연구

사업이란 실로 고통스러운것이였다. 

그러나 김정호는 모든것을 이겨 내면서 산과 강, 바다모양을 적어 넣었고 도로와 그 리수를 표시했다. 때로는 산 

하나를 두고 하루를 넘기기도 하고 허기진 배를 그러안고 바위밑에 쪼그리고 한밤을 지새우기도 하였으며 짐승

들이 울부짖는 무서운 산골짜기에서 온밤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확고하였다. 

하나하나의 자료가 늘어 나는것이 무척 기뻤다. 

김정호는 백두산에만 해도 다섯차례나 올랐으며 제주도 한나산에도 올라 그 높이를 재고 정확히 기록하였다. 

그러던 김정호는 그만 병이 나서 할수없이 집으로 돌아 오게 되였다. 

집에 와보니 집안살림은 말이 아니였다. 안해는 남의 집 삯일을 해주고 근근히 생계를 이어 가고 있는 형편이였

다. 그보다도 10여년만에 돌아 오니 인정에 주린 딸과 안해는 아버지와 남편을 붙들고 놓지를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딸애의 사정사정하는 말이다. 

《아버지, 이제는 우릴 두고 가지 마세요.》 

그러나 김정호의 생각은 오직 지도에만 가 있었다. 

김정호는 먼저 지금까지의 자료에 기초하여 《청구도》 라는 지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지도를 작성하는데 안해와 딸도 적극 도와 나섰다. 

전하는데 의하면 딸은 근면하고 재능 있는 문필가였다고 한다. 

그는 늦도록 시집을 안 가고 아버지의 연구사업을 도와 직접 글을 쓰고 판을 새겼을뿐아니라 여기에 가산이 탕진

된 이후에는 어머니와 함께 기름장사, 광주리장사를 하여 그 비용을 보장했다고 한다. 

이것은 김정호의 가정이 지도제작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 하는것을 말해 준다. 

온 가정의 고심어린 노력끝에 1834년에 마침내 새로운 지도인《청구도》를 만들어 냈다. 

《청구도》는 18세기 정상기가 만든 《동국지도》보다 훨씬 정밀하며 조선 8도를 세로 22개, 가로 29개의 방안

으로 나눈 다음 그 지형을 통일적으로 정확하게 그려 놓은것이였다. 

김정호는 《청구도》를 만들기 위하여 그 이전시기에 만든 지도들을 참작하면서 이름이 있다고 하는 산들의 위

치, 산줄기모양, 강, 호수의 형태를 표시하고 지방의 중요지점들과 교통시설들을 체계적으로 표시하였다. 또한 

앞부분에는 고대조선, 삼국시기, 고려시기의 지도를 따로 만들어 붙이고 리조시기 8도의 도, 주, 현들의 위치를 

잘 알아 볼수 있도록 하였으며 기호들에 대한 설명까지 주었다. , 

뿐만아니라 지도에서 다 표현하지 못한 내용은 지도안의 빈 자리에다 간단히 써넣어 정확히 인식되도록 만들었

다. 



* 27년만에 완성된 《대동여지도》 



그러나 김정호는 자신이 만든 《청구도》에 대하여 다시 깊이 연구한 결과 몇가지 부족점들과 함께 부정확한 문

제들이 있다는것을 발견했다. 

그는 안해와 딸이 그렇게도 매여 달렸지만 다시금 자료조사의 길에 올랐다. 

《당신은 저 딸애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하는 부인의 마지막 말이 발등에 밟혀 왔지만 김정호는 큰마음을 다

잡고 다시금 이 길에 나섰다. 

《남들이 믿을수 있고 우리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수 있는 정확한 지도를 만들자.》 

그는 온 나라 8도의 방방곡곡을 돌고 또 돌았다. 이렇게 하기를 또한 10여년간 김정호는 이 땅 그 어디를 막론하

고 세차례나 돌았던것이다. 그러니 그가 집을 나서서 20여년간을 이처럼 떠돌이생활을 한 셈이다. 

《해여 진 옷에 찌그러 진 갓》을 눌러 쓰고 온 나라, 온 고을들과 층암절벽을 오르고내리기를 어찌 헤일수 있으

랴. 한번에 안되면 또다시 오르고 또 안되면 다음날에 다시 오르고 하니 한해가 언제 갔는지 누가 알랴. 그 누가 

바래주는 이도 없는 심산유곡 수백리 산길과 들판을 걸었고 깊고 얕은 수천갈래의 크고작은 강과 하천을 건넜으

며 때식을 넘기면서 이를 끝내 완성하고야 말았다. 

김정호는 이제는 자료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집에서 지도를 새롭게 제작하려는것이였다. 

그런데 집에 돌아 오니 한평생 고생하던 부인은 벌써 이 세상사람이 아니였다. 

다만 딸만이 헌 오막살이를 지키고 있을뿐이다. 

《아, 조금만 더 살지 벌써 가다니. 이제는 지도도 얼마간만 있으면 되겠는데.》 

김정호는 땅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혼처를 구하여 딸을 시집 보낸후 자신이 때식을 해먹으면서 지도제작에 달라붙었다. 

이제는 목판을 새길 차례가 되였다. 그런데 시집 보낸 딸이 남편을 잃고 집으로 돌아 오는 불행이 겹쳐 졌다. 

그는 딸을 데리고 또다시 지도제작에 심신을 바쳐 나갔다. 

김정호는 칼을 들어 목판을 새겨 나갔다. 손에서는 가죽이 터지고 피가 흘렀다. 

그는 이런 힘든 일을 딸에게도 시켰다. 딸애의 손바닥에도 못이 박혔지만 김정호는 그보다도 그 한획, 한선이 더 

귀중하였다. 

그리하여 김정호는 근 27년이라는 오랜 기간 꾸준하고도 의지있는 노력으로 하여 끝내 1861년에 《대동여지도》

를 완성해 내고야 말았다. 순조임금때 만들기 시작한 그의 지도는 현종, 철종 세 임금을 거쳐서 매듭을 짓게 된것

이다. 

《대동여지도》는 우리 나라를 지구우의 위도선에 따라 22개의 부분으로 나누고 16만 2,000분의 1 축척에 기초

하여 만든 전 조선적인 첫 지도이다. 22개의 개별적인 이 지도를 전부 펴서 련결시키면 그 넓이가 33m²나 된다. 

《대동여지도》는 함경도 온성으로부터 제주도까지를 22개의 단으로 나누고 그것들을 각각 한책씩으로 접어서 

첩본으로 만든것인데 한 측면은 통일적인 축척에 따라 북남방향으로 120리, 동서방향으로 80리가 되도록 하였

다. 

특히 김정호는 작업에서 지도에 올릴 자료들과 표시하는 기호체계를 짜는데 모든 심혈을 기울이였다. 그는 지난 

날의 성과뿐아니라 자신이 직접 답사한 자료에 토대하여 고도의 통일성과 정밀성, 과학성을 보장하였다. 때문에 

현대에 와서 만든 조선지도를 그때의 크기인 16만 2,000분의 1 지도로 만들어 놓고 《대동여지도》와 맞추어 보

면 두 지도가거의 일치하게 된다. 이 하나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여기에 정력을 쏟아 부었으며 자료의 정확성

에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알수 있게 된다. 

그는 지도에 나라의 상업, 교통운수발전과 외래침략자들의 침공을 막을 때에 필요하다고 생각한것들은 선참으

로 올렸으며 중요하게는 도로표시에 10리를 사이에 두고 점을 찍어 놓음으로써 지도상에서 거리도 알수 있게 만

들었다. 《대동여지도》는 19세기 중엽 우리나라 지리지도학에서 가장 큰 성과라고 볼수 있다. 



* 지도때문에 쓴 역적루명 



김정호는 애국자로서, 학자로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기 한생과 온 가정까지도 다 바쳤다. 

김정호는 언제나와 같이 책과 지도를 손에서 떼여 본 일이 없으며 그의 상우에는 《방여기요》를 비롯한 수많은 

서적들과 함께 싸리로 만든 지구의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김정호는 진정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애국적인 지향으로부터 《대동여지도》를 조금이

라도 더 정확히 만들기 위해 자신의 온갖 지혜와 정력을 다 바치였다. 

그는 또한 《대동여지도》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 그들이 리용하도록 하기 위해 인쇄판을 자체로 짜고 출

판까지 하였다. 

《대동여지도》의 방대한 판각인쇄작업은 오늘의 현대적인 기술로도 사실상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김

정호는 이 련폭지도를 자신이 제도해 내였고 판각하였다. 이것은 그가 목판인쇄기술에서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

다는것을 보여 준다. 김정호는 먼저 인쇄한 지도 몇권을 자기 친구들과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리하여 서당친구였던 리용희는 어용대장으로서 이 지도를 참고로 우리 나라 해안에 기여 든 프랑스군함들을 일

격에 물리쳤다. 

후날 리용희는 김정호를 위하여 이 지도첩을 대원군에게 바치였다. 

그러나 쇄국정책에 빠진 대원군이 김정호의 수고를 알리 없었다. 

그는 노발대발하여 김정호를 당장 잡아 들이라고 하였다. 

《고얀 놈 같으니. 나라의 비밀이 새여 나가게 하다니.》 

리용희가 아무리 그 지도가 이번 싸움에 요긴했다고 하였건만 대원군은 듣지 않았다. 

포도대장이 김정호의 집으로 달려 들고 그는 결박지운 몸이 되였다. 포도청에 끌려 온 그에게 곤장이 내려 지고 

무서운 악형이 들씌워 졌다. 온갖 고초를 락으로 삼으며 살림을 털어 근 30년간을 바쳐 온 피의 대가가 과연 이것

이란 말인가? 

그래도 그의 생각은 쓰다가 만 《대동여지도》를 어떻게 하면 끝내겠는가 하는것뿐이였다. 옥중에서 마저 쓰려

고 했지만 고문에 팔의 뼈가 부러져 그러지도 못했다. 

딸이 날마다 조밥 한덩이를 들고 옥바라지를 왔다. 살창으로 밥을 들이밀고는 하염없이 서서 눈물만 흘리였다. 

무지한 옥졸들은 가혹한 고문끝에 끝내 김정호를 죽이고야 말았다. 

만사람의 찬사와 축복을 받아야 할 학자는 이렇게 옥중에서 역적의 루명을 쓰고 생을 마치고 만것이다. 

그후 김정호의 과학적재능과 지울수 없는 활동을 찬양하여 《리향견문록》 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김정호는 본래 재능이 많았고 지리학을 몹시 사랑하였으므로 널리 자료를 수집연구하였다. 일찌기 지구도를 

제작하였고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는데 자기 손으로 잘 그리고 잘 새겨서 인쇄하여 세상에 배포하였다. 상세

하고 정밀하기가 고금에 비할바 없다. 나도 한권을 얻어 정성껏 베꼈는데 참으로 보배로 되고 있다. 또 그는 <대

동여지고> 10권을 쓰다가 탈고하지 못하고 서거하였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또한 당시 리규경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이렇게 지적했다. 

《…요사이에 김정호라는 사람이 《대동여지도》 20권을 지었는데 특별히 바둑판모양과 글자번호를 따라 펴보

게 되였으니 참고하기가 아주 편리하고 선뜻 보고도 환하게 잘 알수 있으며 조금도 착오가 없다. 그 고산이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우수하고 정밀한 정도가 보통이 아니다.》 

그러면서 그 지도의 내용이 정확하고 상세하며 풍부하므로 이 지도책은 반드시 세상에 전할만 한것이라고 찬사

를 아끼지 않았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와 함께 《대동지지》 (32권 15책)를 남기였으며 《천구도》, 《지구의》 등도 서술하

였다. 

무지몽매한 봉건통치배들은 그를 리해할수 없었지만 인민들과 학자들은 그를 알았으며 적극 내세워 주려 하였

다. 

오늘도 지리지도학자 김정호가 나라의 크고작은 산발들을 누비며 고심끝에 만들어 놓은 《대동여지도》는 후대

들의 과학사업에 훌륭히 리용되고 있다. 

 

 

조선민족경제문화개발추진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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