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자료실

 

제목 : 47년간 북에 포로로 갇혔던 유영복씨 주간조선 인터뷰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11-07-05 조회수 : 953



















 




유영복(81)씨를 만나러 가면서 기자는 긴장했다. 그간 전·현직 대통령부터 사형수까지 수많은 취재원을 만났지만 국군포로로 북한에서 반세기를 살다가 탈출한 사람은 만난 일이 없었다.



지난 6월21일 오후 서울 중계동 6·25국군포로가족회 사무실로 갔다. 유씨는 최근에 회고록 ‘운명의 두 날’(도서출판 won)을 출간했다. 기자는 회사를 나서기 직전 막 그 책을 독파했다.



유씨가 중공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것은 1953년 6월 11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불과 42일 전. 며칠만 견뎠더라면 유씨는 평화가 찾아온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운명은 가혹했다. 42일을 견디지 못한 게 47년이라는 암흑 같은 포로 생활로 이어졌으니.



유씨는 81세라는 나이를 의심케 할 정도로 혈색이 좋았다. 외모만으론 47년을 북한 땅에서 핍박받으며 지냈다고 믿어지지 않았다. 10년간 자유의 공기를 흠뻑 마셔서인가. 기자는 6·25전쟁을 겪지 않은 전후 세대의 한 사람으로 유씨에게 예를 표하고 싶었다.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살아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씨의 부친은 황해도 해주교도소에서 장기수에게 목공 기술을 가르쳤다.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일자리가 없어진 부친은 솔가해 월남했다. 마포형무소에서 역시 죄수들에게 목공을 가르쳤다. 유영복은 부모와 함께 마포형무소 관사에서 지내다 6·25전쟁을 맞았다. 피란길에 나섰지만 한강 다리가 끊겨 길이 막혔다. 스무 살이었던 유영복은 의용군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관사로 돌아가지 않고 자취를 하는 친구 집에 갔다. 그런데 자취 집에 찾아온 학생들의 협박을 받고 강제로 의용군에 지원했다.



대한민국 국가지도부는 6·25전쟁 사흘 만에 허겁지겁 퇴각, 인민군의 남하를 막는다며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서울 시민이 탈출하지 못하고 서울에 갇혔다. 하루 뒤 서울은 북한 공산군 치하로 바뀌었고, 많은 청년은 의용군으로 끌려가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친척 집 마루 밑에 굴을 파고 3개월간 숨어 지낸 청년도 있었고, 서울 교외 태릉의 한 허름한 민가에서 여장(女裝)을 하고 지낸 이도 있었다. 그럼에도 운이 나쁜 많은 청년들이 의용군에 끌려갔다. 숭문중학교 학생 유영복도 그중 한 명이었다.



유영복은 다른 의용군들과 함께 그날 인민군복을 지급받았다. 학생에서 하루아침에 국군의 적(敵)인 인민군으로 변신했다. 이후 인민군 유영복은 수많은 주검을 목격했다. 어느 전투에서는 중학교 같은 반 친구였던 정국주가 총에 맞아 죽는 걸 봤다. 시신을 땅에 묻을 겨를도 없이 살기 위해 국군에 총을 쏘아댔다.



어느 날 남쪽 지방으로 행군하던 중 유영복은 삐라를 발견했다. 그 삐라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행군이 늦어지고 보급이 엉망인 상황을 보고 삐라의 내용이 사실일 것으로 받아들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행군하던 중 그는 의용군 2명과 함께 대열을 이탈했다. 인민군 3인은 무기도 없이 민가를 찾아 산길을 내려가던 중 국군에 포위되었다. 그는 “강제로 끌려나온 의용군으로 지금 탈출해 서울로 가려던 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냉정한 답변이 되돌아왔다.



“이놈들아, 의용군이든 뭐든 인민군과 함께 우리에게 총을 겨눈 놈들 아니냐. 너희들은 우리의 적일 뿐이야.”



전시에 인민군복을 입고 있으면 그대로 인민군이었다. 이렇게 그는 포로가 되었다. 안동형무소를 거쳐 부산 동래의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 1950년 겨울을 동래 포로수용소에서 보낸 그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미해군 LST를 탔다. 오랜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였다.



포로들은 매일 노동에 동원되었다. 눈보라가 몰아치거나 폭우가 내리는 날을 빼놓고는 일을 했다. 큰 돌을 날라 파쇄기에 집어넣어 자갈을 만들었다. 포로들의 식수는 시내에서 길어온 물에 소독약을 뿌린 뒤 약을 가라앉혀 사용했다. 온종일 땀을 흘리고 씻지 못하니 이와 피부병이 들끓었다. 이는 옷을 벗어 털어내야 했고 피부병은 한 달에 한 번씩 DDT 소독을 받는 게 전부였다.



1952년 들어서 포로 교환이 이슈가 되었다. 6월이 되자 의용군 출신 포로들을 대상으로 북송 여부를 심사하겠다고 했다. 유영복은 당연히 남한을 선택하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포로들 사이에서는 남한에 남았다가는 평생 포로 출신이라는 낙인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소문이 돌았다. 유영복은 잠시 흔들렸지만 곧바로 남한으로 마음을 잡았다. 심사관 앞에 섰다.



“북송을 원하는가? 남한에 남기를 원하는가?”(심사관)

“서울로 가고 싶습니다. 제 소원은 오직 가족을 만나고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것뿐입니다.”(유영복)



그는 남한을 택한 다른 포로들과 함께 거제도를 벗어나 경북 영천의 한 수용소로 옮겨졌다. 영천수용소에서 다시 심사가 이뤄졌고, 행선지가 결정된 후 2년 동안 입고 있던 PW(전쟁포로)복을 벗을 수 있었다. 기차로 수원에 도착해 그는 석방증명서를 받았다.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아버지와 여동생을 극적으로 만났다. 어머니는 동생 세 명을 데리고 38선 바로 아래 있는 친정(황해도 연안)으로 피신을 했다고 들었다. 그는 아버지에게만 친구들과 의용군에 끌려갔었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포로생활을 했다는 얘기는 끝내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재회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그에게 국군 소집 영장이 나왔다. 아버지는 의용군 딱지를 떼기 위해서는 국군에 입대해 공훈을 세워야 한다고 입대를 종용했다. 입대 전날 그는 여동생(경애)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1952년 8월 26일, 서울역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배웅하며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큰 공을 세우고 오너라. 아버지는 너를 믿는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는 가족이 모두 함께 살고 있을 테니 언제나 그것을 희망으로 기억해라.”



그는 논산훈련소에 입소해 국군 군복을 지급받았다. 2년1개월 전, 인민군복을 입었던 그였다. 그는 신병훈련을 마치고 최전방인 육군 5사단 27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27연대는 김화지구의 최전선에서 인민군·중공군과 고지전(戰)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3대대 3중대 1소대에 배치되었다.



1953년 6월 10일. 그는 부대원 몇 명과 함께 적 초소와 가장 근접한 전호(戰壕)로 잠복근무를 명령받았다. 그날 밤은 아무 일 없이 흘렀다. 날이 밝자 밤을 새운 병사들은 긴장이 풀리며 졸음이 쏟아졌다. 바로 그때 적진으로부터 포사격이 시작됐다.



“적의 포탄이 우리 진지 앞뒤로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포연과 날리는 흙먼지로 인해 앞을 볼 수가 없없다.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총을 부둥켜안았다. 얼마 후, 골짜기 곳곳에서 적군이 새카맣게 밀려오는 게 보였다. 중공군이었다. 우리는 적을 향해 정신없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동시에 우리 진지를 향해 엄청난 포격이 집중되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리고 참호는 힘없이 무너져 내려 몸을 숨길 수가 없었다.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었다.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중공군을 향해 본능적으로 총을 쏘아댈 뿐이었다.… 어느 순간 눈앞이 하얘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몸은 무너진 전호에 반쯤 묻혀 있었다. 그리고 중공군들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반신이 완전히 묻힌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살아 있는 전우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운명의 두 날’)



하루아침에 국군포로가 된 유영복. 얼마 후 그는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포로들은 국제법대로 처리된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그뿐. 포로 송환 얘기는 없었다.



유영복은 다른 포로들과 함께 평안북도 철산군에 있는 광산지역으로 옮겨졌다. 포로들에게는 손으로 모나즈라는 광물을 캐는 작업이 주어졌다. 10월 초 포로들은 또 이동했다. 여러 날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함경남도 용양광산. 이곳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10월 8일 북쪽으로 7~9㎞ 더 들어간 검덕광산에 도착했다. 포로들은 직접 막사를 지었다. 포로들은 검덕광산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이어 포로병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고 ‘내무성 건설대 1708부대’로 호칭되었다. 검덕광산은 북한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광산으로 아연 같은 광물을 채굴했다. 얼마 후 1707부대가 합류했다. 이 부대 역시 국군포로로 구성돼 있었다. 1000여명은 검덕광산에서 기약 없는 중노동을 해야 했다. 유씨의 증언이다.



“북한은 전후 철로 부설 등 각종 복구 사업이 산적해 있었다. 국군포로는 전후 이 복구 사업에 동원되었다. 국군포로를 임금도 없이 공짜로 부려먹었다. 더 부려먹지 못할 정도로 폐인이 되었을 때 정년퇴직으로 내보냈다.”



포로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쓰러져 나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 역시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영복은 여기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계속 유독가스를 마시며 중노동만 하면 몸에 병이 들어 살아남지 못한다. 덜 힘든 측량사가 되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야간학교에서 측량기사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힘들 때마다 나는 반드시 훌륭한 기술자가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그것만이 이곳에서 살아남는 길이었다.” 그는 3년6개월의 공부를 마치고 측량기술 자격증을 땄다. 그 기간 수많은 동료가 질병이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1957년, 그는 우연히 황해도 연안군 용도면 발산리 교량동이 휴전과 함께 북한 땅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황해도 연안은 어머니의 친정, 즉 자신의 외가가 있는 곳이다. 6·25전쟁 직전 38선 아래에 있던 곳이어서 어머니는 전쟁통에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피란을 갔었다. 그는 혹시 어머니가 그곳에 계실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으로 어머니 소식을 알아봐 달라고 상부에 부탁했다. 얼마 후 어머니(강덕순)가 살아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건설대에서 여름휴가를 받아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검덕을 떠난 지 3일이 지나서야 천태역에 내렸다. 그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난다는 사실은 기뻤지만 한편으로 북한 땅에서 재회가 이뤄진다는 사실에 서글펐다.



“상봉의 기쁨을 누리면서도 마음이 참 복잡했다. 만약에 내가 포로가 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남한으로 송환되기만을 꿈꾸어 왔는데, 이제는 북한에 끌려온 덕분에 이렇듯 어머니와 만나게 되었으니 이 야릇한 운명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가 없었다.”



1952년 8월 25일 군입대 전날 여동생과 함께. 그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거적때기로 입구를 덮은 토굴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영양실조로 퀭한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기적적으로 만난 아들에게 혼처가 있는지를 물어본다. “나를 힘들 때마다 도와주고 동생들도 보살펴주는 처녀가 있는데 만나보지 않겠느냐?”



그는 어머니를 만나러 간 길에 뜻하지 않게 혼인을 약속하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남한행’을 가슴에 품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는 북한에서 살아남자고 결심했다. 다음해 두 번째 고향 방문에서 그는 약혼자 홍성은과 혼례를 올린다. 두 사람은 결혼사진조차 찍지 못했다. 부부는 한동안 떨어져 지내다 검덕광산에서 살림을 차려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사진도 뒤늦게 찍었다.



1959년, 어머니가 5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동생들을 검덕광산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동생들은 당원과 군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국군포로 출신’인 형으로 인해 차별대우를 받았다. 대신 병을 얻어 일찍 죽고 말았다.



부부는 아이가 없었다. 결국 부부는 입양을 하기로 결심하고 1967년 딸을 입양했다. 5년 뒤에는 아들을 입양했다. 그는 1990년 정년퇴임 때까지 훈장과 공로 메달 6개를 받았다. 그만큼 성실하게 일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차별은 여전했다. 아들은 군대에 가고 싶어 했으나 받아주지 않아 군인이 되지 못했다. 그는 차라리 입양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찾아왔다. 1994년 아내가 시름시름 앓다가 눈을 감고 말았다. 아내도 없고 자식들도 곁을 떠난 상태에서 그는 살아갈 희망이 없어졌다. 그러던 차에 중국을 통해 한국에 갈 수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예 길이 없이 북한 땅에서 죽게 되는가보다 했는데 그런 사실을 알고부터 나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남으로 돌아가자고 결심했다.”



2000년 들어 그는 상상치 못했던 소식을 들었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다는 뉴스였다.



“그 장면을 보고 싶어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텔레비전이 있는 집을 찾아갔다. 집안에 들어서니 벌써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 들어갈 곳이 없었다. 나는 겨우 사정을 해서 간신히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비행기에서 내려 김정일 위원장과 악수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두 뺨에 줄줄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이틀 뒤 6·15남북공동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유씨는 공동선언문 내용을 보고 너무나 실망했다.

“공동성명이나 그밖에 보도 어디에도 국군포로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내가 너무 조급하게 기대를 했는지 몰라도 매우 허전하고 서운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마디만 하고 갔어도 그렇게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내가 허망한 꿈을 가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대가 무너지니 몸이 아파왔다.”



유씨는 탈출을 결심했다. 결행 날짜는 7월 28일. 김대중 대통령이 다녀가고 43일 만이었다. 중국까지 동행하기로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가다가 실패하면 바로 죽음이에요. 아시지요?”

“안다. 이미 나는 죽었어. 여기만 벗어날 수 있다면 내 목숨을 건다. 나는 무조건 간다. 너에게 다 맡기마.”

“알았어요. 아저씨, 그럼 내일 당장 떠나도록 해요.”



그는 2000년 8월 30일 한국에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 94세의 아버지는 아들을 만났고, 6개월 뒤 눈을 감았다. 10월 20일 육군 제5사단 복귀 및 전역식을 가졌다. 현재 경기도 이천에서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지금 남한 사람들은 6·25전쟁도 모르고, 국군포로가 북한에서 얼마나 비참하게 살다 갔는지를 모른다. 6·25는 끝나지 않았다. 살다 온 사람이 증언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누가 증언하나? 남의 역사는 배우면서도 왜 60년 역사를 배우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기자가 “6·15남북공동선언 합의문에 국군포로에 대한 언급이 없어 실망했다”는 말에 놀랐다고 하자 유씨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동안 죽을 만큼 힘이 들어도 조금만 기다려보자, 조금만 기다려보자 하고 살았다. 우리를 지휘한 장교들도 있고 어엿한 대한민국 정부가 있는데 언젠가는 우리를 찾으러 오겠지 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는 뻔히 살아 있는 국군포로를 한 명도 못 데리고 왔다. 북한에 온 대한민국 대통령은 한마디 언급도 안 했다. 그래서 내 발로 오기로 결심했다.”





◇유영복은

1930년 4월 1일 황해도 해주 출생

1943년 9월 해주 옥정국민학교 졸업

1947년 부모와 함께 월남

1950년 숭문중학교 재학 중 6·25전쟁 발발

7월 5일 강제로 의용군에 끌려감

늦가을 국군에 포로로 잡힘

1951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

1952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과 함께 한국 선택

육군 제5사단 27연대 입대

1953년 6월 11일 강원도 김화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힘

1953년 6월11일~2000년 7월 27일 북한에서 국군포로 생활

2000년 7월 28일 북한 탈출

8월 30일 한국 귀환 입국

10월20일 육군 제5사단 복귀 및 전역식. 현 6·25국군포로가족회장








    조성관 주간조선 편집위원-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목록  
총 방문자수 : 5,729,788 명
오늘 방문자수 : 776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