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 녹둔도 영유권

 

제목 : 녹둔도의 역사성과 반환
작성자 : 조병현 날짜 : 2007-04-07 조회수 : 1062



2007/02/19 11:17

http://blog.naver.com/woodzip/70014428020

녹둔도 문제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맺은 북경조약에 따라 시베리아 연해주일대가 러시아에 귀속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동북 변경은 러시아와 역사상 최초로 국경선을 접하게 되었다.



이 때 그들은 백두산 정계비에 새겨진 '토문'을 그들 나름대로 '두만강'이라 해석하고, 두만강 하루에서부터 상류를 향한 만주 휘춘(揮春) 근역에 토자비(土字碑)를 새워 국경선을 확정함으로써 이제까지 우리나라와 청나라간의 쌍방적 접경관계가 삼각 접경관계로 바뀌었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 종래 우리 영토였던 두만강 하류의 녹둔도가 러시아령으로 귀속되고 말았다.

이 섬은 사차마도(沙次麻島)라는 이름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섬으로 일찍부터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의 방비와 여진족의 내륙침입을 방비, 견제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조선정부에서는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1882년 1월 고종은 어윤중을 서북경략사로 명하고 임지로 떠나는 그에게 "녹둔도는 본시 우리 땅이니 이번에 가서 되찾을 수 없겠는가 잘 살펴보라."고 명하였고,

1899년 청나라와 러시아간의 국경 재감(再勘)때에는 청나라측 대표인 오대징에게 녹둔도 반환교섭을 의뢰하였으며, 그 뒤 우리나라와 러시아간에 국교가 열리자 러시아 공사에게 이 섬의 반환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그들의 무성의로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또한 고종은 김광훈·신선욱 두 사람을 현지로 파견하여 녹둔도 관계지도를 작성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 지도는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라는 이름으로 그 당시의 녹둔도의 지리적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나타낸 것이다.



이 지도에 따르면 주민 가운데 우리 민가가 113호에 인구 822명이 우리 풍속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는 녹둔도가 그들의 영토로 관할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함은 물론 타국인의 접근도 막고 요새화하였다.

한국변경사 연구(양태진)


녹둔도

지금은 러시아땅인 두만강 하구의 여의도 10배만한 녹둔도(鹿屯島). 조선 초 태조 이성계가 이곳을 여진족으로부터 수복한 이래 사슴섬, 즉 녹도(鹿島)라고 불려왔다.



그러다가 선조 16년(1583년) 조정에서 여기에 둔전(屯田)을 설치한 후 “백성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녹둔도(鹿屯島)로 불리기 시작했다.

선조 20년에 여진족이 침입해 11명의 군사를 살해하고 농민 160여명을 납치해간 ‘녹둔도 사건’이 발생했다.

지역해군사령관으로서 이 섬 방어책임을 지고 있던 당시 43살의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은 이 사건으로 장형(杖刑)과 함께 백의종군해야 했다.



조정은 즉각 두만강 건너까지 대군을 파견해 여진족에 타격을 가했다.

그만큼 녹둔도 사수(死守)에 대한 조선의 의지는 강했다.

이 반격 작전에서 이순신은 큰 공을 세워 재기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까지도 녹둔도에 이순신의 녹둔도 전승(戰勝)비각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녹둔도’는 섬이 아니라 러시아쪽 육지와 연결돼 있다.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분명히 섬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두만강 하구의 퇴적작용이 그같은 자연의 조화를 부린 듯하다.



이 녹둔도가 러시아손에 넘어간 것은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조약 체결 때다. 30년이 지난 1889년 고종 26년에야 이 사실을 알게된 조정이 청나라에도 항의하고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에게도 요구했으나 들어줄리 만무했다.

2년 전 이곳을 탐사한 국내조사팀(팀장 이기석 서울대 지리교육학과 교수)은 갈대숲과 늪지의 초목들로 우거진 원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곳은 시베리아 아무르 호랑이의 피난처 구실을 하면서 야생동물의 천국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20여 차례에 걸쳐 “녹둔도는 비옥하여 경작할 만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조사팀이 이번에는 러시아측의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20세기 초까지도 녹둔도에 살았음을 보여주는 연자방아와 놋쇠밥솥 등을 확인했다고 한다.



1984년 11월 북한과 구(舊)소련은 국경문제 협상을 벌인 바 있다.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는 녹둔도에 관한 양자 합의내용이 궁금하지만 영토를 이렇게 싱겁게 방기한 우리의 역사도 안타깝다.

2002.07.22 조선일보



빼앗긴 땅 녹둔도를 찾아서



국경영토문제에 대비해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7월 24, 25일 남북한과 러시아·영국·프랑스 학자들이 참가한 동해 지명 국제 세미나를 마친 한국 참가자 일행, 그러니까 이기석 지리학회 회장(서울대 교수)을 비롯한 지리학자·역사학자 ·언론인 15명은 두만강 하구에 있는 옛 우리 땅 녹둔도 현장 답사 길에 올랐다.

우리 역사에 나와 있는 사실이지만 녹둔도는 조선시대까지도 경흥지방에 속한 우리 선인들이 살던 섬이었다.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의 방비와 여진족 침입을 견제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녹둔도는 홍수로 인한 강류 토사의 퇴적으로 동쪽해안이 연해주와 연육되자, 영유권 문제가 일어났으며 1860년 청(淸)과 러시아간 북경조약에 의해 녹둔도는 부당하게 러시아 영토가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힘없는 우리나라가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빼앗긴 땅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 강을 지나 포시에트항까지 280km를 중고 버스(한국산)로 달리는 동안 갈대와 초목이 마구 자란 들판과 숲, 산과 땅들이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마치 충청도나 경상도의 산야를 달리는 듯한 늘상 보아오던 그런 풍경이었다.



필자 뿐의 느낌이 아니었다. 아마도 발해시대 그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이 다른 나라 땅이란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은 두세 군데 호랑이 출몰지역이란 호랑이 그림표지판을 보았을 때였다.



포시에트에서 1박한 일행은 다음날인 26일, 하산의 러시아 국경수비대로부터 녹둔도 특별출입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차편이 문제였다. 가까스로 폐차나 다름없는 러시아 트럭을 빌려 두 시간 가량 수리해 타고 여기서 18km 떨어진 녹둔도로 들어갔다.



끝없는 갈대밭이 펼쳐져 있고 나지막한 구릉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마침 우기라서 계속 비가 내려 트럭바퀴가 푹푹 빠져 늪지대를 연상케 했다.

여의도 면적의 10배 가량 된다는 녹둔도엔 국경지역 거주민을 소개한 이래 사는 사람이 없었으며 멀리 두만강변의 러시아 국경수비대 초소만 보였다.



들판엔 한창 해당화·엉겅퀴·도라지·참나리·패랭이·뱀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고 질경이 풀도 보였다.

이기석 교수가 가리키는 두만강 대안의 7.5km 떨어진 북한 땅엔 우리 산들이 연이어 잇고 그 앞 옛 경흥에 높이 90여m의 조산보(造山堡)도 보였다.

이 조산보엔 일찍이 이순신 장군이 선조의 명을 받고 조산만호로 부임해와 녹둔도에 침입, 우리 병사와 농민을 살해, 약탈해 간 여진족을 토벌했다.

이 교수와 5명의 지리학자 등 두만강유역 연구팀들은 지



난 2월 녹둔도 2차 답사 때 선인들이 농사 짓던 논자리와 집터, 7개의 연자방아와 놋쇠밥솥 등을 발견했는데 이 교수는 조산보에서 똑바로 마주 보이는 곳이 주거 중심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 교수팀은 녹둔도 남쪽 약 5km 지점에 흐르는 샛강을 녹둔강이라 명명했으며 샛강 가까운 곳에 남북으로 길게 5~6m 되는 균형 있는 사구들이 7~10m의 높이로 보아 토성을 쌓은 곳이 아닌가 보고 있다.



우리 일행은 허가된 두 시간 가량 녹둔도 이곳저곳을 찾아보고 해당화·도라지꽃 몇 송이를 꺾어들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한·중·러 3국 접경지역의 빼앗긴 녹둔도와 항일 독립운동의 주요한 역사적 본거지 중 하나인 연해주 일대는 역사적·지리적·문화적으로 우리 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 대한 더욱 큰 관심과 종합적 연구로 가깝게는 개발투자와 후일, 통일 후 제기되어야 할 국경 영토문제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文 明 浩<고려대 석좌교수 ·전 문화일보 논설주간



녹둔도 노령화에 따른 반환 노력



1882년(고종 19년: 청 광서 8년) 5월 청국 주재 러시아 영사 뷰철(Evgeni de Butzor)이 청의 직예총독 장수성을 통해 우리나라와 통상 수교할 것을 제의해 왔다.



이에 우리측은 양측이 통상을 하려면 러시아로서는 청국의 길림에 월입(越入)해야 하는데 현 상황으로 어렵지 않겠는가?

단지 아국과 우리나라가 두만강 한쪽에 접하고 있으니 후일 양국간에 조약성립을 보아 양국이 파원하여 그곳 강구에 이르러 녹도 북쪽에 계패(界牌)를 세워 양국 월계인민(越界人民)이 발생하면 청아조약(淸俄條約) 조관에 따라 변리키로 하고 해상통상으로 해삼위와 원산항이 가까우니 각국의 수륙통상장정을 보아 처리함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되니 그 뜻을 전해달라고 하고 수교제의를 거절하였다.

이 당시는 한·청 양국간에 간도문제가 제기되어 우리나라 서북경역 지대의 사정이 전반적으로 복잡다난하던 시기로 선뜻 러시아의 제의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특히 러시아측의 녹둔도 불법점유에 대해 청과의 조율이 되지 못한 상태인 까닭에 통상문제를 논의하게 되면 반드시 이 문제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청과 간도문제로 시비가 벌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청을 통한 협조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1883년(고종20년) 어윤중이 서북경략사로 임명되어 이해 정월 28일 임금을 알현함에 고종이 말하기를 "녹둔도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가서 귀정지울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어윤중이 답하기를 이 섬은 중국 훈춘계와 상접하고 두만강 사이에 있어 귀정지사는 용이하지 않을 듯 합니다 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이해 10월 4일 어윤중이 서북변경지를 순방하고 돌아와 고종에게 복명함에 왕은 이번에도 녹둔도 사정에 대해 물음에 "녹둔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으로서 신이 조산에 도착하여 지형을 살펴보니 섬 동쪽에 모래가 쌓여 저쪽 땅과 연접되어 있고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우리나라 사람들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1885년 11월 러시아 웨벨공사가 김윤식에게 조아육로통상조약을 언제 체결함이 좋겠느냐고 함에 청아감계시 우리나라에서도 파원해 회감 연후에 논의함이 좋겠다고 함으로서 한로국경 감계에 동참할 뜻을 분명히 하였다.



위의 회감이란 훈춘계약에 따른 감계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녹둔도 귀속문제를 제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청측 대표인 오대징의 무성의로 이 뜻이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원세개의 다음과 같은 유감의 뜻을 알게 되었다.




즉 청국관리의 지리적 미숙으로 불합리한 약서를 만들어 조선에 탄식을 끼치게 하였다는 발언과 함께 이 땅이 아라사에 점유된 지가 오래되어 쇄환하지 못하고 있는바 언제 복취(復取)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라는 염려를 함께 하게 되었다.



1886년 11월 15일자 일본외교문서 가운데는 녹둔도 지역 정탐보고서 가운데 한로통상 수교 후 조선정부는 러시아에 녹둔도 반환요청을 하였다고 하고 1890년 6월 20일자 입전혁(立田革)의 보고에도 녹둔도 반환 요구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의 정탐자들과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이교겸(二橋謙)도 조선정부가 웨벨 공사에게 녹둔도 반환 요청 사실을 본국정부에 보고하였다고 하고 있고 구수삼랑(久水三郞)도 당시 경흥감리 사무 김우현으로부터의 전문(傳聞)이라고 하면서 녹둔도 반환요청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제반 사실은 당시 조선정부가 청러간의 잘못 획정된 국경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고유의 녹둔도를 불법 부당하게 점유한데 대한 반환노력임과 동시에 분명한 입장 표명으로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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